<백두대간 산마을>30. 전북 장수군 장계면 덕유산자락 명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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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안강 댓글 0건 조회 153,659회 작성일 18-12-27 14:06본문
덕유산 자락 명덕리(전북 장수군 장계면)를 들어서면 주목(朱木)군락이 한눈에 들어온다.주목은 집안에 두고 보는 관상수로는 최상으로 치는 나무다.자연산일 경우 수천만원대를 호가한다.그 귀하다는 주목이 명덕리에는 지천으로 깔려 있다.
명덕리에는 몇 십만주의 주목이 자라고 있다.물론 자연산은 아니고 모두 기른 것이다.이 주목은 金태섭(73)씨 개인소유다.「주목박사」로 불리는 金씨는 30년전부터 주목을 심고 가꾸었다.
노후대책으로 시작한 것이 명덕리의 명물이 됐다.이젠 혼자의 일이 아니고 마을의 일이 됐다.주목을 심거나 가지치기를 할 때는 마을사람들이 대부분 동원돼야 할 정도다.
이제 나이가 든 金씨도 자신의 소유라고 생각하지 않는다.자신의 주목이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 나가 보통사람들도 쉽게 감상하기를 바라고 있다.
주목은 배수가 잘되는 사질양토에다 높은 곳에서 잘 자라는데 명덕리는 이런 조건에 잘 맞는다.마을 주위로 덕유산.남덕유산.육십령.백운산등 백두대간의 산줄기들이 내달리고 있다.
金씨의 주목농장 덕분에 명덕리는 상당히 품위(?)있는 마을이 됐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큰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마을이다.그 아픔은 마을이 「과부촌」이라고 불리는 데서도 쉽게 유추할 수 있다. 일제시대 이 마을 근처 육십령에는 몰리브덴,즉 수연광산이 있었다.수연은 총기제작에 필수적인 비철금속이다.일제는 중일전쟁.태평양전쟁을 치르기 위해 이곳 광산을 집중적으로 개발했다.마을남자들이 징용으로 끌려갔다. 일제가 떠나면서 힘겹던 광산일은 끝났다.그러나 「굴병」이 기다리고 있었다.광산 굴속에서 돌가루를 오래 마시는 사람들은 규폐증에 걸리는데 이 마을에선 이것을 「굴병」이라 불렀다.
마을 남자들은 하나 둘씩 쓰러졌다.광산일을 했던 남자들은 대부분 요절했다.광산일을 했던 이 마을 토박이로 70세가 넘은 남자들은 아무도 없다.주목박사 金씨도 6.25 직후 다른 마을에서 왔다.
한귀리(74)할머니는 남편 李삼식씨를 30년전에 떠나보냈다.
일제시대 광산에서 몇 년 일한 것이 원인이 돼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떴다고 한다.그녀의 시댁식구 가운데 남편을 비롯해 4명의 남자가 모두 굴병으로 세상을 떴다.
그래서 마을 아낙네들은 이 폐광을 죽음의 광산이라 해 쳐다보지도 않았다.그러나 세월은 참 묘한 것이다.
이 폐광은 10여년전부터 차돌을 캐는 광산으로 다시 개발됐다.일제시대 때 깊게 굴을 파면서 주위에 쌓아놓은 돌무더기에서 질 좋은 규석이 많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아낙네들은 다시는 찾지 않을 듯했던 이 광산으로 다시 발길을 돌렸다. 남편을 일찍 잃은 할머니도 있었고 며느리도 있었다.부업을 위해서다.살아가기 위해서는 억척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굴안에 들어가 하는 작업은 아니다.부녀자들은 괭이로 돌을 캐내고 삼태기에 돌을 담은 뒤 머리에 이고 가 차에 돌을 뿌린다.그러고는 품삯을 받아 자녀들을 기르고 가르쳤다.덕이 많다는 뜻의 덕유산은 산마을이 지닌 아픔마저도 품안에 안아버리는 모양이다.
볼거리 먹거리
장수는 충절의 고장이라 부른다.그 으뜸이 논개의 충절이다.
논개는 선조 7년(1574년)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주촌마을에서 태어났다.태어난 날이 특이하게 갑술년 갑술월 갑술일 술시라 해서 이름을 술(戌)의 뜻인 「개」를 따서 붙였다고 한다.
자라서 장수현감 최경회(崔慶會)의 첩이 된 그녀는 남편을 따라 진주로 갔다.1593년 진주성이 함락되고 남편이 전사하자 왜장을 껴안고 진주 남강에 몸을 던졌다.그때 나이 19세였다.
논개사당과 논개생가를 가볼 만하다.
두번째는 장수향교지기 정경손의 충절이다.장수향교는 조선 태종7년(1407년)에 창건됐다.1592년 임진왜란 때 왜병이 침입해 불태우려하자 정경손이 죽음을 무릅쓰고 왜병에 항거했다.그 충정에 감동한 일본 적장이 「향교에는 절대로 침입 치 말라」는 글을 정경손에게 주었다.덕분에 장수향교는 훼손되지 않았고 향교가운데 원형이 그대로 보존된 가장 오래된 곳이 됐다.
세번째 충절은 타루비(墮淚碑)에 얽힌 얘기다.장수현감 조종면이 전주감영으로 가는 길에 갑자기 나타난 꿩 한 마리때문에 벼랑에 떨어져 죽었는데 이것을 본 마부가 자기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 바위에다 꿩과 말을 그림으로 그려놓고 자신도 벼랑에 떨어져 죽었다.이 노비의 충절이 가상하다 해 세운 비석이 바로 타루비다.
장계면에 있는 궁실농원가든(0656-352-0256)은 흑염소 숯불구이를 잘한다.방목해 키운 흑염소를 이 집 특유의 양념으로 버무려 구워 먹는데 염소 특유의 비린내가 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주말이나 공휴일에는 회식하려는 단체손님들 이 많이 찾는다.아귀탕.해물탕이 생각나면 장수읍에 있는 구억관(0656-351-5588),낙지전골을 원하면 유림회관(0656-351-2253)을 권하고 싶다.장수에 들르면 이곳 특산물인 곱돌석기를 사보는 것도 괜찮다.곱돌은 납석 또 는 각섬석이라 불리는 자연석으로 입자가 치밀하고 단단하며 불에 잘 견디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장수 곱돌석기는 돌솥.불고기판.약탕관.절구통등으로 좋다
명덕리에는 몇 십만주의 주목이 자라고 있다.물론 자연산은 아니고 모두 기른 것이다.이 주목은 金태섭(73)씨 개인소유다.「주목박사」로 불리는 金씨는 30년전부터 주목을 심고 가꾸었다.
노후대책으로 시작한 것이 명덕리의 명물이 됐다.이젠 혼자의 일이 아니고 마을의 일이 됐다.주목을 심거나 가지치기를 할 때는 마을사람들이 대부분 동원돼야 할 정도다.
이제 나이가 든 金씨도 자신의 소유라고 생각하지 않는다.자신의 주목이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 나가 보통사람들도 쉽게 감상하기를 바라고 있다.
주목은 배수가 잘되는 사질양토에다 높은 곳에서 잘 자라는데 명덕리는 이런 조건에 잘 맞는다.마을 주위로 덕유산.남덕유산.육십령.백운산등 백두대간의 산줄기들이 내달리고 있다.
金씨의 주목농장 덕분에 명덕리는 상당히 품위(?)있는 마을이 됐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큰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마을이다.그 아픔은 마을이 「과부촌」이라고 불리는 데서도 쉽게 유추할 수 있다. 일제시대 이 마을 근처 육십령에는 몰리브덴,즉 수연광산이 있었다.수연은 총기제작에 필수적인 비철금속이다.일제는 중일전쟁.태평양전쟁을 치르기 위해 이곳 광산을 집중적으로 개발했다.마을남자들이 징용으로 끌려갔다. 일제가 떠나면서 힘겹던 광산일은 끝났다.그러나 「굴병」이 기다리고 있었다.광산 굴속에서 돌가루를 오래 마시는 사람들은 규폐증에 걸리는데 이 마을에선 이것을 「굴병」이라 불렀다.
마을 남자들은 하나 둘씩 쓰러졌다.광산일을 했던 남자들은 대부분 요절했다.광산일을 했던 이 마을 토박이로 70세가 넘은 남자들은 아무도 없다.주목박사 金씨도 6.25 직후 다른 마을에서 왔다.
한귀리(74)할머니는 남편 李삼식씨를 30년전에 떠나보냈다.
일제시대 광산에서 몇 년 일한 것이 원인이 돼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떴다고 한다.그녀의 시댁식구 가운데 남편을 비롯해 4명의 남자가 모두 굴병으로 세상을 떴다.
그래서 마을 아낙네들은 이 폐광을 죽음의 광산이라 해 쳐다보지도 않았다.그러나 세월은 참 묘한 것이다.
이 폐광은 10여년전부터 차돌을 캐는 광산으로 다시 개발됐다.일제시대 때 깊게 굴을 파면서 주위에 쌓아놓은 돌무더기에서 질 좋은 규석이 많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아낙네들은 다시는 찾지 않을 듯했던 이 광산으로 다시 발길을 돌렸다. 남편을 일찍 잃은 할머니도 있었고 며느리도 있었다.부업을 위해서다.살아가기 위해서는 억척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굴안에 들어가 하는 작업은 아니다.부녀자들은 괭이로 돌을 캐내고 삼태기에 돌을 담은 뒤 머리에 이고 가 차에 돌을 뿌린다.그러고는 품삯을 받아 자녀들을 기르고 가르쳤다.덕이 많다는 뜻의 덕유산은 산마을이 지닌 아픔마저도 품안에 안아버리는 모양이다.
볼거리 먹거리
장수는 충절의 고장이라 부른다.그 으뜸이 논개의 충절이다.
논개는 선조 7년(1574년)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주촌마을에서 태어났다.태어난 날이 특이하게 갑술년 갑술월 갑술일 술시라 해서 이름을 술(戌)의 뜻인 「개」를 따서 붙였다고 한다.
자라서 장수현감 최경회(崔慶會)의 첩이 된 그녀는 남편을 따라 진주로 갔다.1593년 진주성이 함락되고 남편이 전사하자 왜장을 껴안고 진주 남강에 몸을 던졌다.그때 나이 19세였다.
논개사당과 논개생가를 가볼 만하다.
두번째는 장수향교지기 정경손의 충절이다.장수향교는 조선 태종7년(1407년)에 창건됐다.1592년 임진왜란 때 왜병이 침입해 불태우려하자 정경손이 죽음을 무릅쓰고 왜병에 항거했다.그 충정에 감동한 일본 적장이 「향교에는 절대로 침입 치 말라」는 글을 정경손에게 주었다.덕분에 장수향교는 훼손되지 않았고 향교가운데 원형이 그대로 보존된 가장 오래된 곳이 됐다.
세번째 충절은 타루비(墮淚碑)에 얽힌 얘기다.장수현감 조종면이 전주감영으로 가는 길에 갑자기 나타난 꿩 한 마리때문에 벼랑에 떨어져 죽었는데 이것을 본 마부가 자기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 바위에다 꿩과 말을 그림으로 그려놓고 자신도 벼랑에 떨어져 죽었다.이 노비의 충절이 가상하다 해 세운 비석이 바로 타루비다.
장계면에 있는 궁실농원가든(0656-352-0256)은 흑염소 숯불구이를 잘한다.방목해 키운 흑염소를 이 집 특유의 양념으로 버무려 구워 먹는데 염소 특유의 비린내가 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주말이나 공휴일에는 회식하려는 단체손님들 이 많이 찾는다.아귀탕.해물탕이 생각나면 장수읍에 있는 구억관(0656-351-5588),낙지전골을 원하면 유림회관(0656-351-2253)을 권하고 싶다.장수에 들르면 이곳 특산물인 곱돌석기를 사보는 것도 괜찮다.곱돌은 납석 또 는 각섬석이라 불리는 자연석으로 입자가 치밀하고 단단하며 불에 잘 견디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장수 곱돌석기는 돌솥.불고기판.약탕관.절구통등으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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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news.joins.com/article/3339187 48088회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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