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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사람들 31 백화산- 분지리 홍 할아버지의 마지막 파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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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안강 댓글 0건 조회 227,025회 작성일 18-08-27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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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미한 경운기 바퀴자국을 따라 전봇대가 산을 오른다. 풀들이 허리까지 자란 길은 들꽃 세상이다. 얼추 헤아려도 수십종이 족히 넘는 들꽃에는 덩치 큰 ‘땡삐’부터 개미까지 꿀을 따느라 분주하다. 꽃에 매달린 작은 생명들은 소나기가 남기고 간 물방울이 때때로 물벼락을 때리는 것도 개의치 않는다. 누가 일러주지 않아도 계절의 변화를 아는 그들은 시간을 아끼고 있었다.

밥짓는 연기가 끊긴 지 5년이 됐다는 분지리의 맨 꼭대기 마을 흰드미에 올랐다. 덩그러니 집 한채가 이화령에서 백화산으로 향하는 백두대간 하늘금에 처마를 잇대고 전설의 문을 연다. 불씨가 닿지 않는 부뚜막에 걸린 두개의 가마솥, 숟가락 몇 개, 그리고 수도꼭지까지 달린 초록색 호스는 비탈밭에 올라올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식들 덕에 산아래 안골로 내려”간 집주인 홍태식(68) 할아버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마당 한구석의 경운기도 마찬가지였다.

홍 할아버지가 물자랑을 늘어놓던 샘은 뒤꼍 밤나무 그늘에서 만날 수 있었다. 달고 시원했다. 3대를 이어오도록 갈증을 달래주던 샘의 돌지붕에는 정한수가 놓여 있었다. 어떤 바람이 담겨 있는 것일까? 30여분 산길을 타야 오를 수 있는 흰드미 옛집을 찾은 이는 홍 할아버지와 평생을 함께 한 할머니였을 것이다. 물봉선보다 더 고왔을 열 여섯 나이에 시집 와 “5남매를 남들에게 손가락질받지 않는 사람”으로 길러 마을에서 부러워하는 효도를 받는 할머니였다. 명예퇴직을 할 수밖에 없었던 큰아들 걱정 혹은 젊은 날 노역의 대가로 비만 오면 날굿이에 시달리는 할아버지의 건강을 기원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쪽마루에 걸터앉았다. 산 넘어 문경을 지나 상주땅에서 져날랐다는 슬레이트 지붕이 여전히 제구실을 하는 탓에 마루는 멀쩡했다. 백두대간에 등을 기대고서도 백두대간 하늘금이 정원인 양 눈앞에 가득 펼쳐진다. 백화산을 중심으로 ‘V’자를 그리는 대간의 한쪽 능선에 기대앉은 탓이다. 문경시에서 펴낸 <문경의 명산>에는 이런 경관을 봉황새가 날개를 편 것이라고 적고 있다. 백화산을 머리로 보고 이화령쪽 대간줄기를 왼쪽 날개로, 속리산으로 이어지는 반대편 줄기를 오른쪽 날개로 보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따르면 흰드미는 봉황의 왼쪽 날개에 올라앉은 셈이다.

골이 깊고 산이 높아 비탈도 급한 땅이지만 흰드미는 흙이 좋아 콩이든 팥이든 심으면 풍년이라고 했다. 그 시절 흰드미는 네 땅 내 땅을 가리지 않았다고 했다. 살기가 곤궁하면 경상도 사람은 백화산을 넘어오고 충청도 사람은 연풍에서 물길을 따라 흰드미로 들어왔다고 했다. 골이 길어 몸만 따라주면 화전 부칠 땅은 얼마든지 있었다. 부지런한 이들은 백화산 정상의 백두대간 마루금에까지 불을 놓았다. 흰드미 사람들은 눈을 뜨면 비탈을 타고 저녁해가 연풍 들에 어스름을 깔 때까지 이랑을 팠다. 그렇게 살다보면 아들에게 대를 물리기 전에 살림이 피게 마련이었다. 그러면 사람들은 살림을 추스려 산을 내려갔다. 빈자리에는 다른 이들을 위해 남기고 떠나면 그만이었다.이런 생활은 흰드미뿐 아니라 안골, 도막, 셋째담 등 분지리의 다른 마을도 마찬가지였다.

21세기를 코앞에 둔 지금도 버스가 들어오지 않는 산골이지만 분지리는 마을에 저수지가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들이 너른 연풍에서도 부러워할 만큼 수확이 좋았다 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정권을 잡은 뒤 쌀로 술 빚는 것을 금했다. 옥수수가 술 빚는 데 요긴하게 쓰이기 시작하면서 값이 천정부지로 오르고 콩 한 가마니가 쌀 한 가마니로 바뀌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 분지리 사람들을 제일 먼저 알아준 곳이 연풍의 술집들이었다. “옛날에는요 ‘현찰 손님인 연풍 사람에게 술을 파느니 분지리 사람에게 외상을 주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할 정도로 경기가 좋았어요. 연풍들 세 평을 들고 와도 분지리 다락논 한 평과 안 바꿨다니까요.” 저수지가 들어선 뒤로 사정은 바뀌었다. 연풍들은 물걱정을 덜었지만 분지리땅은 안개에 시달려야 했다. 콩도 팥도 제대로 여물지 않았다. 분지리 젊은 이장 심재홍(39)씨는 제초제를 먼저 탓했다. 일조량이 줄어든 것보다 급격히 산성화된 땅이 더 문제라는 게 심 이장의 생각이었다.

인심도 많이 변했다. 일제가 식민지의 치욕을 안기면서 의병들을 잡겠다고 온 산을 불바다로 만들어도, 한국전쟁 당시 밤마다 빨치산들의 식량 공출에 시달려도 줄지 않던 인구가 눈에 띄게 줄었다. 백화산에서 시작하는 긴 골을 따라 오순도순 살아가던 77호를 결정적으로 떠나보낸 것은 화전정리사업이었다. 40만원의 보상금은 작지 않은 돈이었다. 제 땅을 갖지 못했던 이들이 먼저 떠나고 80년대 부동산 바람이 불면서 또 한 차례 사람들이 분지리를 떴다. “15가구 30명이 전부예요. 흰드미는 아예 사람이 살지 않은 지 오래고 가장 크다는 안골에도 8호가 남았어요.” 심 이장은 자신이 살고 있는 셋째담에는 “옛말이 맞을라고 그러는지 이제 세 집만 남았다”고 혀를 찼다.

사라진 것은 집과 사람들뿐이 아니었다. 비탈밭도 많이 줄었다. 화전정리사업은 국유지였던 땅을 낙엽송 밭으로 만들어버렸다. 화전정리사업과 부동산 바람을 견딘 비탈밭도 이제는 묵히는 것이 태반이다. 노인들에게 비탈밭은 힘에 부치는 탓이다.

감자는 여전히 다른 지역에 비해 수확도 좋고 소출도 많지만 “그저 마당에 심어 도시로 나간 자식들의 먹을거리나 대는” 것이 고작이라고 했다. 콩이 자라고 팥이 자라던 비탈밭에는 두릅나무가 자란다. 봄이면 용돈 정도는 마련할 요량으로 심은 것이 이제 분지리 특산물이 된 셈이다. 매운탕의 뒷맛을 없애는 양념으로 쓰이는 초피나무 열매도 예전에는 제법 수입이 됐지만 어쩐 일인지 가격이 자꾸만 내려간다고 걱정이다. 글쎄 “예전에는 한 근에 9천원도 받았는데 올해는 4천원이나 줄라나.” 중간상인이 농간을 부리는 것 아니냐고 의심을 해보지만 열매 자루를 이고 지고 20여리 산길을 내려가 다시 버스를 타고 서울까지 가는 일을 노인들은 엄두도 낼 수 없다.

귀하디귀한 논도 여기저기 묵고 있었다. 계곡을 따라 들어선 다락논이라 기계를 들이댈 수 없어 모든 게 사람 손에 의존한다. 여주쌀보다 품질이 좋다는 평을 들을 정도여서 수매걱정은 없지만 막상 벼농사는 심 이장 같은 젊은 사람이나 욕심을 부릴 일이다. 땅에 대한 희망을 간직하고 있는 심 이장에게 분지리는 인분(분)이 뿌려져 있는 풍요로운 땅(지)이다. 그 땅이 필요로 하는 것은 고단한 노동이지 돈을 파종하는 도시 사람들의 화려한 웃음이 아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이화령에 터널을 뚫으려 했는데 경상도 대통령 대가 끊긴다고 안동 양반들이 들고 일어나는 통에 못 뚫었대요. 터널은 97년 말에 개통됐지요. 어른들 말이 맞는지 정말 경상도 대통령 대가 끊겼잖아요.” 심 이장이 이화령 터널로 말을 돌린 것은 최근 또 들먹이는 땅값을 설명하기 위해서다. 이화령에는 또 하나의 터널이 뚫릴 계획이다. 여주-구미간 고속도로가 지나게 될 것이다. 80년대에 한 차례 훑고 지나간 부동산 바람에 분지리 땅값은 이미 만만찮게 올라 있다고 했다. 귀농을 생각하던 이들도 땅값에 놀라 주저앉는다. 논밭 다 합쳐 1만여평의 농사를 짓는 심 이장은 “농사꾼은 죽을 때까지 땅을 내놓지 않는 법”이라며 도시 사람들의 유혹을 이기겠다는 각오를 말한다. 홍 할아버지는 힘에 부쳐 묵혀야 하는 땅에는 나무를 심었다고 했다. 평생을 갈고 씨뿌려온 땅에 대한 농부로서의 마지막 파종은 홍 할아버지의 아들이나 손주가 수확할 것이다.

출처: http://100mt.tistory.com/entry/백두대간-사람들-30-백화산-분지리-홍-할아버지의-마지막-파종 [<한겨레21> 신 백두대간 기행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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